기부자 | 김서영(문리대 68) 동문 타계 1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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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3-01-09 10:42 조회1,457 댓글0본문
유족이 모교에‘ 고고학 학술기금’으로 15억원 쾌척
여학생 모임‘ 마로니에회’ 참석위해 매년 한국 방문
- 한국 돈 15억 원이면 100만 달러가 넘습니다. 어떻게 서울대 고고학과에 기부할 생각을 했는지요?
“ 아내가 기뻐했을 겁니다. 고고학에 대해 애정이 깊었거든요. 원래 물리학도였지만 은퇴 후 우리 역사와 뿌리를찾는데 관심이 많았어요. 고고학 연구를 위해 직접 산스크리트어까지 공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김서영 동문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과 독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앨라배마 탤러디가 칼리지에서 물리학 교수로 일하다 은퇴했다. 조지아주 동창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 한국에서 고고학 같은 기초 학문 분야에 흔치 않은 기부였을 것 같은데요.
“ 안 그래도 학교서 많이 놀라더군요. 고고학과 단일 기부로는 역대 최대라고 들었습니다. 기부금은 ‘김서영 고고학 학술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심포지엄 개최, 장학금 지급 등 한국 고고학 연구 저변을 넓히는 데 사용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용처를 부탁했습니다.”
- 부인 김서영 박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 공부에 욕심이 많았고 매사에 열정적이었습니다. 제게는 대화가 통하는 친구 같은 아내였고요. 어떤 분야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물질적 세속적인 것보다는 의미와 가치, 보람을 더 중요시했다는 점에서도 뜻이 맞았습니다. 평생 아침을 해 주었고 밥 먹을 때는 꼭 내 옆에 앉아 있어 줬어요. 찌개도 참 잘 끓였는데 … 너무 빨리 갔어요.”
- 많이 생각나시겠습니다.
“ 제가 텍사스 휴스턴에서 의과대학 다닐 때 처음 만났습니다. 50년 전이었네요. 주삿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여자가 한국서 왔다고들 소문이 났는데 알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별 관심을 안 가졌지만 한국 학생이 적다 보니 가끔 모이곤 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제가 고물차를 몰고 있었는데 한번씩 라이드를 해주면서 친해졌어요. 몇 년 뒤 아내는 선을 보기 위해 가끔한국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공항 라이드와 픽업도 해 줬습니다. 하지만 계속 선을 봐도 결혼이 이뤄지지 않아 제가 조언도 해주고 하다가 우리 둘이 가까워지고 결혼까지 하게 된 겁니다. 아내가 저를 먼저 좋아했던 것 같아요. 대화가 통하고 저를 전폭적으로 이해해 주는 아내가 저도 싫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는 텍사스에서 의대 졸업 후 아내와 함께 독일로 유학을 가서 박사 공부를 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왔다. 이후 김 박사는 앨라배마에서 나사(NASA) 연구원으로 5년 가까이 일하다 안과 병원을 개업했고, 부인 김서영 박사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 안과 의사 시절은 어땠나요?
“ 의대 졸업은 했지만 바로 의사 가운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독일에서 5년을 더 공부했거든요.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는 나사에서 우주의학 분야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중력과 진동의 변화 따른 몸의 변화, 산소 결핍 시의 신체 반응 같은 연구를 했는데 무척 재미있었어요. 아내도 제가 그런 일을 하는 걸 아주 좋아했고요. 당시 제 연봉이 약 6만5천 달러였습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애도 키우고 한국도 자주 가고 하다 보니 늘 빠듯했습니다. 돈이 더 필요했어요. 그때 마침 친구와 뜻이 맞아 동업으로 안과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 이곳에 와서 보니 호스피스 병원뿐 아니라 초현대식 너싱홈 재활센터까지 규모가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시작하셨나요?
“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잡고보니 어느새 소명처럼 된 것이지요. 제가 마라톤을 좋아하는데 앨라배마에 살면서도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대회에 자주 참가했습니다. 2005년 무렵인가 그때도 대회 참가 차 애틀랜타에 왔다가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말기암 환자 2명을 돕게 되면서 한인 시니어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 자선이었는데 돕는 인원이 늘고 비용 부담도 커지면서 아예 호스피스 병원을 하나 세우면 더 많은 한인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인들 많이 사는 조지아 귀넷카운티에 미선호스피스 병원을 시작한 겁니다.”
미선호스피스의 미선(Mesun)은 한자로 아름다울 미(美), 선택할 선(選)자로‘아름다운 선택’이라는 뜻이다. 영어 스펠링으로는 나와태양, 독일어로는 에너지를 뜻한다. 인생의 바람직한 마무리를 돕는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김 박사는 앨라배마에서 제법 돈을 잘 버는 것으로 소문났을 때도 1600스퀘어피트 남짓한 자그마한 집에서 살았다. 차도 오래된 픽업트럭을 몰았다고 한다. 그만큼 검소했다는 말인데, 미국 친구들이 그래서 더 자신을 신뢰했던 것 같다고 했다. 김박사는 지금도 앨라배마의 그 집을 오가며 지낸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 부인을 먼저 보내고 1년이 지났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시간이 참 많아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늦게 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좀 더 자주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 왔을 때, 또 의사가 되었을 때 나는 무슨 꿈을 꾸었던가를 생각하고 또 얼마나 그 꿈을 이루었는지도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오래전 꾸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또 다른 꿈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그 꿈을 위해 조금씩 준비하고 있어요.”
김 박사가 말하는 새 꿈은 북한에 종합의료센터를 짓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꾸기 시작했다는 꿈이다. 김 박사는 당시 정상회담 직후 북한의 안과 의료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안과학 교실에 1억 원을 기증한 바 있다. 1942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개업한 장인 김승곤씨의 이름으로였다.
김한선 박사는 김서영 동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하버드 대학 졸업 후 동부의 한 의과대학 교수로 있다.
출처 :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미주동창회보 202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