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재단 기부스토리

Donation story
미주재단 기부스토리

기부자 | 임낙균 동문 "장학금 받고 즐겨라!"

페이지정보

날짜2021-06-16 10:23 조회2,766 댓글0

본문

“장학금 받고 즐겨라!”


약대 64학번 임낙균.


로스엔젤레스 카운티의 남쪽 토렌스에 거주하는 임낙균 기부자를 만나 기부의 변을 들어보니 첫 마디가 이렇다.

“장학금 받고 신나게 놀아보라는 뜻으로 기부합니다. 대학 시절 나는 아르바이트하며 학비 버느라고 대학 생활을 즐기지를 못했어요.”

가난한 시골 출신의 임낙균 동문은 대학 4년 동안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 625 전쟁 세대인 우리들은 가난 속에서 홀로 살아남기를 해야 했습니다.”

625 전쟁 때 서울에서 전북 익산으로 피난을 가서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나이 될 때까지 학교를 가지 못했다. 동네에서 전쟁고 아들과 놀고 다녔다. 그러다가 6학년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국민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를 눈여겨 보던 담임 선생이 그를 개인 교습을 시키며 제대로 공부를 하라고 했다. 흙 속의 진주가 발견되듯 그는 학교에서 1등을 계속하더니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도 수석을 놓지 않았다.

“그 담임 선생님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지요. 옛날에는 그런 사랑과 의무감이 있는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서울대 약대에 들어가며 가족과 마을을 놀라게 했던 그는 그의 특출한 리더십을 계속 발휘하며 약대에서도 학생회장에 선출됐다. 나름대로 선거 전략을 잘 세워 학생회장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크게 웃는다.

“그때 학생회장은 매일 데모대와 함께 다녔어. 학생과장이신 정교수님이 쫓아다니며 길거리 데모 대열이나 경찰서에 가 있는 우리들을 끌어내 가고…”

임낙균 동문은 약대를 졸업하고 해군 병원에서 약사 장교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 후 서울의 한 약국에서 함께 근무하던 약사와 결혼을 하고 미국 유학 길에 나섰다. 1975년 앨라바마의 샘포드대학에 도착해부부가 함께 주경야독을 하며 미국 약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 후LA로 왔다.

그리고 LA에서 3개의 약국을 운영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성공의 길에서도 항상 꿈꾸었던 것은 자기처럼 가난한 가정, 교육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돌봄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증가하고 있는 다른 민족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에게 시선이 갔다. 단일민족,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에서 그들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겪는 고난을 보며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이들에게도 따뜻한 멘토의 손길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어릴 적 함께 놀던 전쟁 고아들, 차별 받고 고생하던 그 아이들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린 시절 어떤 멘토를 만나는가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걸 제가 체험했잖아요.”

임낙균 동문은 그가 어릴 적 한 교사로부터 시작된 은혜를 어떻게 사회에 되돌릴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전남교육청과 연결해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들 20명을 초청해 3주간미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가지게 했죠."

그 다음 해에는 경북 교육청에도 의뢰를 해서 40명의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 비용으로만 수십만 달러가 들었다. 서울대학교 약대는 오늘의 그가 있게 한 꽃봉우리였다. 그는 매년 정기적으로 후배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1만달러씩 내고 있다.

“저희 때는 학비벌랴, 공부하랴, 데모하랴, 제대로 대학 생활을 즐기지 못한 거 같아요. 물론 많은 추억은 있지만요. 생활에 쪼들리지 말고 대학 시절을 즐기며 보다 큰 꿈을 꾸는 시간을 가지라고 장학금을 내고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기부자 임낙균 동문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LA남쪽타운 가디나의 조그만 한식 집에서 쌈밥으로 점심을 하며 서울대학교에서 제2, 제3의 임낙균이 가난과 역경을 딛고 출현한다면 더 소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