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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약식 | "한홍택 교수 · 백훈 여사 '한백장학금' 서울대학교발전기금 $1,000,000 쾌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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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1-12-15 10:49 조회4,04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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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지난해 12월 8일 서울대 총장실과 남가주 한홍택 교수 자택 연결 줌을 통한 증정식. 사진 왼편 한홍택 교수와 부인 백 훈. 오른쪽 오세정 서울대 총장

 

 사진2. 지난해 11월 4일 LA에서 한홍택교수의 기부금 전달식. 왼편 노명호 미주동창회장, 오른편 한종철 서울대 발전기금 미주재단 이사

 

 더 많은 용이 개천에서 나오도록..


“이제는 한국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힘들다’라고 종종 듣습니다. 반가운 일은 아니지요. 오히려 앞으로는 ‘더 많은 용이 개천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가정 형편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얻어 같은 출발선에서 사회생활에 뛰어들 수 있다면, 더 많은 용이 개천에서 나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

 


한홍택 교수(공대, 기계공학 60) - Washington University 교수, Penn State University 교수, UCLA교수등의 교수직, 공군재료 국립연구소, 공군 과학 연구소, IBM 등의 연구직, 그리고 한국의 KIST 원장, 서울대 월드클래스 교수, 스웨덴의 방문교수 등 평생을 다양한 지역에서 기계, 재료공학부문에 업적을 쌓은 유수의 학자. 1999년에는 복합기계, 재료의 설계및 성형제작 부문의 공로로 호암상 공학상을 수여받았다.


이제 자신의 새로운 은퇴 생활을 개척하고 있는 한홍택교수와 부인 백훈(미대, 응용미술 61)는 지난해 12월 모교 서울대학교에 ‘한백 장학기금’을 설립, 1백만달러 기부를 약정하고 1차로 10만달러를 출연했다. 개천에서 많은 용을 내보내기 위해 뛰어든 것이다. 그 자신도 개천 바닥에서 오른 용이기 때문이다. 한백 장학기금을 통해 매년 공대와 기계공학부에서 각각 2명씩 선출해 4년간 전체 장학금을 주게 된다.


1960년대 한국은 나라 전체가 넉넉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학생 한홍택은 교과서를 살 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빌려 봤다. 시험때에는 돌려 주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미리 공부를 해 두었다. 가난했지만 즐거운 학창시절이었고, 좋은 친구들을 만났으며, 그 당시 처음 지어진 기숙사 생활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3, 4학년때는 미8군 사령부의 장학금으로 대학생활이 좀 더 풍요로울 수 있었다. 이택식 교수님을 존경했고 공업 역학 성적이 뛰어나 이 과목을 가르치신 이해 교수님과 친하게 지냈다. 한홍택이 ROTC로 복무할 때 이해 교수님은 미국 유학을 가셨고, 한홍택은 제대 후 이 해에 교수님이 계신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이다.


“그 시절엔 모든 분이 그러셨겠지만, 1966년에 저도 100달러 정도 들고 비행기를 타고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Penn State가 있는 State College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도착했죠. 돈이 아슬아슬했죠.”


1년 후 서울대 미대 61학번 백 훈이라는 여성이 같은 캠퍼스로 유학을 와서 Interior Design을 공부하게 됐다. 한홍택의 부인이 됐고 백 훈여사는 이후 Full-Time Mom 으로 평생을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헌신한다.


1971년 박사학위 후 Hamilton, Canada 의 McMaster University 에서 Postdoc을 하게 됐고, 1년후 Dayton, Ohio 에서 공군 재료실험실 내의 국립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부임해 이곳에서 셋째딸까지 낳게 됐다. 이후 캘리포니아의 로렌스 리버모 국립연구소를 거쳐, 세인트 루이스의 Washington University 에 부교수를 부임하게 됐다. 이때 나이가 들어보여야 진급이 빠르겠다는 사연이 생기면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세인트 루이스의 조용한 Midwest 생활을 즐기며 딸들도 잘 크고 있을 때 다시 미국 모교인 Penn State 에서 교수직 요청이 왔다.


“제 아내는 그곳이 학생 시절 가난하게 살던 곳이라 가고 싶지 않았지만 제가 딸 핑계를 대며 설득을 해 결국 또 이삿짐을 싸게 됐죠. 그러나 그곳에서 살면서 아내는 캘리포니아 삶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UCLA 에서 교수를 찾고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됐지만, 딸들과의 반대 여론에 성사가 되지 못하다가 3년후인 1992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한홍택 교수가 자신의 인생을 말하는 ‘7년의 갑갑증’대로 7년후 재미한인과학자 협회 회장을 거쳐, 워싱턴 DC 인근의 공군 과학 연구소의 프로그램 매니저로 옯기게 되고, 이곳에서 또 7년을 지낸 후에 한국에 나가 KIST 원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한국을 너무 몰라 준비가 안됐고 한국만의 관행이라는 것이 있어 적응이 어려웠죠.”


서울대학교 교수 생활 후에 2013년 미국으로 돌아왔고 2020년에는 완전한 은퇴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틈틈이 시도했던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그가 하고 싶어하는 기업, 그의 맘에 맞게 운영하는 기업 투자에 나섰다. 결과는 투자 기업의 기하급수적 성장이었다. 그의 모교 기부의 씨앗돈이 됐다.


“저는 모교 서울대가 저에게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홍택 교수는 이제 그의 경험과 지혜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다시 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를 통해 모교와 동문, 재미과학기술자 협회, 그리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에 나섰다.


그가 동문들과 모교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다 – “제 경험에 의하면 앞으로 올 일을 예측할 수 없지만 씨를 뿌리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언젠가 좋은 일들이 돌아옵니다. 우리가 사는 직장, 지역,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바꾸어 인용합니다. Ask not what others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them.”


- 취재 김인종 (농대 74)